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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 매단 그네가 하늘 위를 춤춘다 - 이희영

웃음 매단 그네가 하늘 위를 춤춘다 푸른 잎이 무성한 한 그루 나무를 뜨락에 심고 그네를 매달았다 비바람 몰아치는 날 나뭇잎은 제 얼굴을 할퀴며 울었다 난 흔들리는 나무를 꼭 껴안았다 내 젊은 날의 모습을 그렇게 붙잡고 싶었다 뿌리 내려 꼿꼿하게 뻗은 나무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이젠 가슴에 꽃씨를 뿌렸다 가슴속에 꼭꼭 숨겨둔 한 송이 꽃이 눈물로 커간다 달빛 지는 뜨락에 눈꽃이 떨어져 쌓인다 웃음 매단 그네가 하늘 위를 춤춘다

카테고리 없음 2023.10.30

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 - 이면우

이면우 시집 (2001) 중 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 깊은 밤 남자 우는 소리를 들었다 현관, 복도, 계단에 서서 에이 울음소리 아니잖아 그렇게 가다 서다 놀이터까지 갔다 거기, 한 사내 모래바닥에 머리 처박고 엄니, 엄니, 가로등 없는 데서 제 속에 성냥불 켜대듯 깜박깜박 운다 한참 묵묵히 섰다 돌아와 뒤척대다 잠들었다 아침 상머리 아이도 엄마도 웬 울음소리냐는 거다 말꺼낸 나마저 문득 그게 그럼 꿈이었나 했다 그러나 손내밀까 말까 망설이며 끝내 깍지 못 푼 팔뚝에 오소소 돋던 소름 안 지워져 아침길에 슬쩍 보니 바로 거기, 한 사내 머리로 땅을 뚫고 나가려던 흔적, 동그마니 패였다

카테고리 없음 2023.10.30

늦가을 - 최하림

늦가을 억새풀들이 그들의 소리로 왁자지껄 떠들다가 지평선에서 그림자로 눕는 저녁 나는 옷 벗고 살 벗고 생각들도 벗어버리고 찬마루에 등을 대고 눕는다 뒷마당에서는 쓰르라미같은 것들이 발끝까지 젖어서 쓰르르 쓰르르 울고 댓잎들이 바람에 부딪치면서 비명을 지른다 가을날은 흐느끼면서 끝을 모르고 흘러간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카테고리 없음 2023.10.30

탈상 - 허수경

허수경 시집 (1988) 중 탈상 내일은 탈상 오늘은 고추모를 옮긴다 홀아비 꽃대 우거진 산기슭에서 바람이 내려와 어린 모를 흔들 때 막 옮기기 끝낸 고추밭에 편편이 몸을 누인 슬픔이 아랫도리 서로 묶으며 고추모 사이로 쓰러진다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남녘땅 고추밭 햇빛에 몸을 말릴 적 떠난 사람 자리가 썩는다 붉은 고추가 익는다

카테고리 없음 2023.10.30

호수 민박 - 박준

박준 시집 (2018) 중 호수 민박 민박에서는 며칠째 탕과 조림과 찜으로 민물고기를 내어놓았습니다 주인에게는 미안했지만 어제 점심부터는 밥상을 물렸고요 밥을 먹는 대신 호숫가로 나갔습니다 물에서는 뭍에서든 마음을 웅크리고 있어야 좋습니다 밤이 지나고 새벽이 오면 동네의 개들이 어제처럼 긴 울음을 내고 안개 걷힌 하늘에 별들이 비늘 같은 빛을 남기고 역으로 가는 첫차를 잡아타면 돼지볶음 같은 것을 맵게 내오는 식당도 있을 것입니다 이승이라면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이곳은 공간보다 시간 같은 것이었고 무엇을 기다리는 일은 시간이 아니라 공간으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카테고리 없음 2023.10.30

장마 - 박준

박준 시집 (2018) 중 장마 - 태백에서 보내는 편지 그곳의 아이들은 한번 울기 시작하면 제 몸통보다 더 큰 울음을 낸다고 했습니다 사내들은 아침부터 취해 있고 평상과 학교와 공장과 광장에도 빛이 내려 이어진 길마다 검다고도 했습니다 내가 처음 적은 답장에는 갱도에서 죽은 광부들의 이야기가 적혀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로 질식사나 아사가 아니라 터져 나온 수맥에 익사를 합니다 하지만 나는 곧 그 종이를 구겨버리고는 이 글이 당신에게 닿을 때쯤이면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라고 시작하는 편지를 새로 적었습니다

카테고리 없음 2023.10.30

선잠 - 박준

박준 시집 (2018) 중 선잠 그해 우리는 서로의 섣부름이었습니다 같은 음식을 먹고 함께 마주하던 졸음이었습니다 남들이 하고 사는 일들은 우리도 다 하고 살겠다는 다짐이었습니다 발을 툭툭 건드리던 발이었다가 화음도 없는 노래를 부르는 입이었다가 고개를 돌려 마르지 않은 새 녘을 바라보는 기대였다가 잠에 든 것도 잊고 다시 눈을 감는 선잠이었습니다

카테고리 없음 2023.10.30

정말 먼 곳 - 박은지

박은지 시집 중 2018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정말 먼 곳 멀다를 비싸다로 이해하곤 했다 우리의 능력이 허락하는 만큼 최대한 먼 곳으로 떠나기도 했지만 정말 먼 곳은 상상도 어려웠다 그 절벽은 매일 허물어지고 있어서 언제 사라질지 몰라 빨리 가봐야 해 정말 먼 곳은 매일 허물어지고 있었다 돌이 떨어지고 흙이 바스러지고 뿌리는 튀어나오고 견디지 못한 풀들은 툭 툭 바다로 떨어지고 매일 무언가 사라지는 소리는 파도에 파묻혀 들리지 않을 거야 정말 먼 곳을 상상하면 불안해졌다 우리가 상상을 잘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의 상상이 맞았는지 틀렸는지 알 수 없었고 거짓에 가까워지는 것만 같았다 정말 먼 곳을 상상하는 사이 정말 가까운 곳은 매일 넘어지고 있었다 정말 가까운 곳은 상..

카테고리 없음 2023.0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