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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나는 아름다움의 섬광을 보았다 - 김소연

우연히 나는 아름다움의 섬광을 보았다* 개를 산책시켜야 한다고 슬리퍼를 신고바깥에 나온 내 친구의 손에는 리드 줄이 들려 있었지만개는 친구를 산책시키기 위해 앞서 걷는다자주 뒤를 돌아보며 자주 웃어주며 배달원은오토바이가 망가졌을 때에는 고통스러워 했지만자신이 아플 때에는 포기를 했다 한다 말일이었고한밤중이었고한겨울이었다몇 년도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했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발암물질이라는 글자를 매일매일 여러 번 보게 된다물을 마시듯이 그게 자연스럽다 복도 타일 위에 놓여 있던 잿빛 깃털 하나복도 타일 위를 기어다니던 거미 하나복도에서 은은하게 풍기는 걸레 냄새 고양이 한 마리가공 앞에서담벼락 앞에서햇빛 앞에서 창문 앞에서 자신의 목숨만큼만 자기 육체를 이끌고자신의 방식으로 놀다가가는 것처럼 일요일마다분..

카테고리 없음 2024.09.08

발자국의 체온 - 임경순

발자국의 체온 산까치 걸어간 새벽 눈길 숭어가 헤엄치는 샛강 어귀 갯벌에 써 논 농게의 부호 고비사막 모래 물결에 낙관을 찍는 낙타 호수를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봄비 문득 걷고 싶은 은행나무의 발목 네 마음이 서성거리는 내 삶의 가장자리 한 편의 시로 자리 잡은 눈물샘 받아들이고 스며드는 곳에는 물렁한 온기가 있다 - 혜화시동인회 시집 (2021) 중

카테고리 없음 2024.08.22

애틋함과 매혹, 선망이 뒤섞인 어떤 당혹감 같은 것

옥주가 집에 가져갈 선물을 준비했느냐고 묻자 예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름 홑이불과 피클도 있다고. "피클?" 야콥이 잘못 들었나 싶은지 큰 키를 굽혀 예후이에게 되물었다. "응, 우리 할머니는 멀리 나가기 힘들어. 피클 같은 건 시골에서는 귀한 거야." 언젠가 시내에서 예후이와 먹어 본 뒤로 할머니는 입맛이 없는 여름이 되면 종종 피클을 찾는다고 했다. 그것은 피클, 그저 작고 가벼운 한 음식에 대한 언급일 뿐인데도 야콥의 표정에는 무언가가 천천히 번지고 있었다. 애틋함과 매혹, 선망이 뒤섞인, 타인이 특별하게 다가올 때 누구나 지니게 되는 어떤 당혹감 같은 것. 야콥이 피클은 집에서도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고 했다. 그것은 마치 채소의 물기를 털어 내듯 아주 쉬운 일이라고. - 김금희 소설 중

카테고리 없음 2024.06.09

9월도 저녁이면 - 강연호

9월도 저녁이면 9월도 저녁이면 바람은 이분쉼표로 분다 괄호 속의 숫자놀이처럼 노을도 생각이 많아 오래 머물고 하릴없이 도랑 막고 물장구치던 아이들 집 찾아 돌아가길 기다려 등불은 켜진다 9월도 저녁이면 습자지에 물감 번지듯 푸른 산그늘 골똘히 머금는 마을 빈집의 돌담은 제풀에 귀가 빠지고 지난 여름은 어떠했나 살갗의 얼룩 지우며 저무는 일 하나로 남은 사람들은 묵묵히 밥상 물리고 이부자리를 편다 9월도 저녁이면 삶이란 죽음이란 애매한 그리움이란 손바닥에 하나 더 새겨지는 손금 같은 것 지난 여름은 어떠했나 9월도 저녁이면 죄다 글썽해진다

카테고리 없음 2023.1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