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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나는 아름다움의 섬광을 보았다 - 김소연

더딘하루 2024. 9. 8. 15:41

우연히 나는 아름다움의 섬광을 보았다*

 

개를 산책시켜야 한다고 슬리퍼를 신고

바깥에 나온 내 친구의 손에는 리드 줄이 들려 있었지만

개는 친구를 산책시키기 위해 앞서 걷는다

자주 뒤를 돌아보며 자주 웃어주며

 

배달원은

오토바이가 망가졌을 때에는 고통스러워 했지만

자신이 아플 때에는 포기를 했다 한다

 

말일이었고

한밤중이었고

한겨울이었다

몇 년도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했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발암물질이라는 글자를 매일매일 여러 번 보게 된다

물을 마시듯이 그게 자연스럽다

 

복도 타일 위에 놓여 있던 잿빛 깃털 하나

복도 타일 위를 기어다니던 거미 하나

복도에서 은은하게 풍기는 걸레 냄새

 

고양이 한 마리가

공 앞에서

담벼락 앞에서

햇빛 앞에서 창문 앞에서

 

자신의 목숨만큼만 자기 육체를 이끌고

자신의 방식으로 놀다가

가는 것처럼

 

일요일마다

분리수거 코너에

산더미처럼 박스가 쌓이고 비닐이 부풀어 오르고 폐종이가 바람에 펄럭이는데

까치발을 들고 보태는 플라스틱

 

쌓이고 부풀어 오르고 바람에 제멋대로 굴러다닐 때에

일요일이라는 것을

재확인하는 반가움

 

매주 일요일마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기쁨

 

*요나스 메카스의 영화 제목 <As I Was Moving Ahead Occasionally I Saw Brief Glimpses of Beauty>(2000)

 

김소연 시집 <촉진하는 밤>(2023)

분리수거를 하고 집 근처를 산책하는 일요일 오후에 읽다